다른 거대 산업들이 다 그러하듯, 반도체 산업 역시 규모의 경제를 따른다. 삼성이나 하이닉스가 수 조원을 반도체 설비에 투자한다는 뉴스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뭐를 생산해서 돈을 벌지는 차치하더라도, 반도체 생산을 위한 준비를 갖추는 데에만 수 조원 혹은 그 이상의 돈이 든다는 말이다. 작은 회사들, 아니 중견 기업이라도 쉽게 나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닌 셈이다.
반도체 산업 자체가 다양한 과학/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엄청난 제작 설비 역시 필요로 하기에 돈이 많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이 정도로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았었다. 최신 공정인 28nm 혹은 그 이상의 미세공정에 뛰어들려면 몇 조 정도로는 (응?)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조 단위로 부으면 다 됐었는데 말이다. 몇 조씩 설비 투자에 쓰는 대인배님들, 그러니까 연봉은 억 단위로 주세요. 조 단위의 돈 역시 작은 회사들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아니, 천억 단위만 되도 쉽사리 투자에 나서기 힘든 금액이다.
천문학적인 초기 투자의 필요성은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그렇게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매우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던 게, 산업을 이루는 구성원(e.g. 반도체 회사들)들 사이의 역학 관계가 고착되어 버리고, 매우 큰 초거대 기업만이 살아남는 독과점 시장으로의 진입까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경쟁에 참여하려면 일단 1조 받고 2조 더 투자부터 해야 하는 상황은 분명 좋은 기업 환경이 아니다.
설계와 제작, 난 둘 다
반도체 산업의 초기 비지니스 모델은 수직적 구조, 그러니까 한 놈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하는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크게 나눠보자면, 대략
이러한 사업 모형business model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꽤나 타당했다. 1980년대까지 "난 둘 다" 모형이 지배적이었고, 그 후로도 자본력을 갖춘 거대 기업은 여전히 이를 표방하고 있다. 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기에 거대 기업인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2010년 반도체 회사 매출 순위: 단위는 million $
위의 표는 2009년, 2010년의 반도체 회사 매출 순위를 보여 준다. 예상대로 외계인 고문의 달인 인텔Intel이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를 삼성Samsung이 열심히 추격하고 있다. 우리의(?) 삼성은 세계 2위의 반도체 회사였고 회사이며 (적어도 당분간은) 회사일 것이다. 혹시 콩삼성? 도시바Toshiba나 르네사스Renesas는 일본, TI (Texas Instrument)와 마이크론Micron은 미국, STMicroelectronics는 프랑스, 하이닉스Hynix는 한국에 근거를 둔 거대 반도체 회사다. 이들의 공통점은 설계와 제작을 동시에 한다는 점이고, 그러기에 엄청난 매출을 올릴 수 있기도 하다. 심지어, 10위 권 밖에 있는 반도체 회사 중에도 제작 설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9위 퀄컴Qualcomm과 10위 브로드컴Broadcom은 뭔가? 얘네는 자체 제작 설비가 없는 회사들인데도 10위권에 들어왔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퀄컴은 무선통신, 브로드컴은 유선통신 등의 분야에서 업계 최고를 달리는 큰 회사다. 자체 제작 설비가 없다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의 규모의 매출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거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들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사업 모형이 존재할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순위권에 들 정도의 큰 회사가 별도의 사업 모형도 없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자체 제작 설비가 없는 이들 회사들이 "난 둘 다"를 표방하는 초거대 반도체 회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설계전문과 제작전문: 팹리스와 파운드리
반도체 제작 시설을 갖추기 위한 천문학적 투자는 고정 비용fixed cost의 증가를 가져왔다. 일단, 고정 비용의 선투자를 감당할 수 없는 회사는 반도체 제작에 뛰어들 수 없다. 그러기에, 돈 없는 작은 반도체 회사들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이런 식으로는 사업 자체를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큰 회사라고 해서 걱정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초기 투자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덩치를 지녔다 할 지라도, 투자금은 언젠가 회수되어야만 한다. 천문학적인 고정 비용에도 불구하고 이익을 남기려면 폭리를 취하거나 매우 많은 판매량을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 무어의 법칙Moore's law을 따르는 반도체 시장은 사업자가 폭리를 취하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반도체 성능은 점점 향상되는 반면 가격은 계속 떨어졌음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결국, 박리다매薄利多賣 쪽으로 전략을 틀 수 밖에 없었다. 제품 당 이윤으로만 보면 박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설비의 감각상각을 포함한 고정 비용을 판매량으로 나눠서 더해주면 왠만해서는 폭리를 취할 수 없었다. 무조건 많이 팔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오고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사업 모형이 바로 설계 전문회사와 제작 전문회사의 분리이다. 이들은 팹리스fabless와 파운드리foundry라고 불리는데, 그 어원을 먼저 살펴보자. 반도체 제작을 영어로 fabrication이라고 하며, 줄여서 팹fab이라고도 말한다. 팹은 제작 행위를 말할 수도, 제작 설비나 시설을 지칭할 수도 있다. 반도체 제작 설비 없이 설계만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는 자체 팹이 없기에, "팹이 없다"는 뜻의 팹리스fabless라 불렸다. 반면, 설계 없이 제작만을 전담하는 회사는 주조/주물 공장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파운드리foundry라 불리게 되었다.
반도체 설계만을 전담하는 팹리스는 제작 설비와 관련된 일체의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집중하는 건 설계 자체이기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칩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할 수 있다. 회사에 있는 설비는 고성능 컴퓨터와 반도체 측정 장비일뿐, 제작 시설은 더 이상 없다. 제작은 파운드리에 용역을 맡기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지 않고 용역을 주기에 칩 하나 당 제작 비용,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위 표의 가변 비용variable cost 부분이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막대한 양을 차지하는 고정 비용을 날려버렸기에 총 비용은 감소하게 된다.
제작만을 전담하는 파운드리 입장은 어떨까? 그들이 생산 설비에 엄청난 비용을 선투자해야 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팹리스-파운드리 모형 덕택에 그들은 안정적인 용역 업체(?)가 될 수 있었다. 생산되는 칩이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지, 경쟁 설계회사와의 피튀기는 싸움에서 살아남을 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설계 전문회사와 약속한 대로 잘만 생산해낼 수 있다면 파운드리는 행복하다. 몇몇 파운드리가 다수의 팹리스 회사를 상대하는 구조가 정착되고 나면, 부족한 수요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진다. 굳이 따지자면 팹리스가 갑甲, 파운드리가 을乙이겠으나, 을이 갑보다 더 힘쎈 상황이라고나 할까.
파운드리 시장의 지배자 - TSMC
팹리스-파운드리 사업 모형의 등장은 반도체 시장을 급격하게 성장시켰다. 예를 들어볼까? 컴퓨터의 그래픽 처리 장치(GPU)를 생산하는 엔비디아NVIDIA나 ATI, 유/무선 랜카드 등의 통신관련 칩을 생산하는 마벨Marvell이나 브로드컴Broadcom, 프로그래밍 가능한 하드웨어(FPGA)를 생산하는 자일링스Xilinx나 알테라Altera, 이들은 모두 팹리스 업체들이다. 이들 회사들의 약력을 훑어보면, 대부분 1990년대 이후에 생겨났거나 급성장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파운드리 시장은 어떨까? 이곳에서 우리는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잘(?) 된 건 다 TSMC 때문인가 보다.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 순위: TSMC짱 무시하지 말라능!
TSMC의 2010년 매출은 무려 $13.3B인데, 이 액수는 반도체 업계 3위인 도시바보다 살짝 앞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반도체 회사 순위"가 조금은 이상함을 알 수 있다. 1위 인텔부터 8위 마이크론에 까지 회사의 매출액에는 설계/제작 부문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왜 TSMC는 저기에 끼워주지 않는단 말인가. TSMC는 제작만 하는 용역이다보니 반도체 회사에 끼워주기 좀 그런가보다. 어쨌든, 중요한 건 TSMC의 규모가 전체 반도체 시장을 기준으로 봐도 꽤나 크다는 거다. 참고로, 제작전문회사 순위에서 삼성은 2010년 기준으로 10위에 불과하다. 뭐, 올해가 지나면 5위권으로 들어올 꺼라 예상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반도체 회사 순위 1위에 빛나는 인텔의 매출액은 2위 삼성의 1.5배 정도이다. 근데, 제작 전문회사 1위인 TSMC는 2위 UMC보다 3배보다도 더 많은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비단 매출액에서만 차이나는 건 아니다. 1위 TSMC와 2위 UMC 사이의 기술력 격차는 매우 심해서, 팹리스에서 설계한 고성능 반도체의 생산은 TSMC가 사실 상 전담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업계 3위인 글로벌 파운드리Global Foundry가 기술력에 있어서는 UMC보다 낫다. 몇몇 팹리스, 이를테면 GPU나 FPGA 등의 고성능 반도체를 설계하는 업체에게 있어서 TSMC는 유일한 제작 파트너인 셈이다. 그리고 TSMC는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파운드리 시장의 미래
반도체 설비의 초기 투자 비용은 공정이 미세화 됨에 따라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라면, 이런 환경은 팹리스-파운드리 사업 모형을 강화시킬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근데 그 양상이 매우 급진적이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본 블로거의 생각으로는, 반도체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인텔이나 삼성 같은 초거대 회사만이 자체 제작 설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이는 필연적으로 파운드리 사업의 성장을 가져오겠지만, 그 열매는 현재 업계를 지배 중인 파운드리 회사로 향하지 않을 것 같다. 인텔이나 삼성 등의 초거대 회사가 파운드리 업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날이 조만간 올꺼라 생각한다. 하지만, TSMC만은 그 열매를 함께 나눌 것이라고 본다. TSMC는 이미 나머지 파운드리 들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크며, 삼성의 초미세 공정은 절대로 범용 옵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파운드리 사업의 규모에 있어서 그러하고,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반도체 산업 자체가 다양한 과학/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엄청난 제작 설비 역시 필요로 하기에 돈이 많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이 정도로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았었다. 최신 공정인 28nm 혹은 그 이상의 미세공정에 뛰어들려면 몇 조 정도로는 (응?)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조 단위로 부으면 다 됐었는데 말이다. 몇 조씩 설비 투자에 쓰는 대인배님들, 그러니까 연봉은 억 단위로 주세요. 조 단위의 돈 역시 작은 회사들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아니, 천억 단위만 되도 쉽사리 투자에 나서기 힘든 금액이다.
천문학적인 초기 투자의 필요성은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그렇게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매우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던 게, 산업을 이루는 구성원(e.g. 반도체 회사들)들 사이의 역학 관계가 고착되어 버리고, 매우 큰 초거대 기업만이 살아남는 독과점 시장으로의 진입까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경쟁에 참여하려면 일단 1조 받고 2조 더 투자부터 해야 하는 상황은 분명 좋은 기업 환경이 아니다.
설계와 제작, 난 둘 다
반도체 산업의 초기 비지니스 모델은 수직적 구조, 그러니까 한 놈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하는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크게 나눠보자면, 대략
-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한 칩의 세부동작을 정의하는 설계design
- 반도체 칩을 물리적/화학적으로 만들어내는 제작fabrication
이러한 사업 모형business model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꽤나 타당했다. 1980년대까지 "난 둘 다" 모형이 지배적이었고, 그 후로도 자본력을 갖춘 거대 기업은 여전히 이를 표방하고 있다. 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기에 거대 기업인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2010년 반도체 회사 매출 순위: 단위는 million $위의 표는 2009년, 2010년의 반도체 회사 매출 순위를 보여 준다. 예상대로 외계인 고문의 달인 인텔Intel이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를 삼성Samsung이 열심히 추격하고 있다. 우리의(?) 삼성은 세계 2위의 반도체 회사였고 회사이며 (적어도 당분간은) 회사일 것이다. 혹시 콩삼성? 도시바Toshiba나 르네사스Renesas는 일본, TI (Texas Instrument)와 마이크론Micron은 미국, STMicroelectronics는 프랑스, 하이닉스Hynix는 한국에 근거를 둔 거대 반도체 회사다. 이들의 공통점은 설계와 제작을 동시에 한다는 점이고, 그러기에 엄청난 매출을 올릴 수 있기도 하다. 심지어, 10위 권 밖에 있는 반도체 회사 중에도 제작 설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9위 퀄컴Qualcomm과 10위 브로드컴Broadcom은 뭔가? 얘네는 자체 제작 설비가 없는 회사들인데도 10위권에 들어왔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퀄컴은 무선통신, 브로드컴은 유선통신 등의 분야에서 업계 최고를 달리는 큰 회사다. 자체 제작 설비가 없다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의 규모의 매출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거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들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사업 모형이 존재할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순위권에 들 정도의 큰 회사가 별도의 사업 모형도 없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자체 제작 설비가 없는 이들 회사들이 "난 둘 다"를 표방하는 초거대 반도체 회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설계전문과 제작전문: 팹리스와 파운드리
반도체 제작 시설을 갖추기 위한 천문학적 투자는 고정 비용fixed cost의 증가를 가져왔다. 일단, 고정 비용의 선투자를 감당할 수 없는 회사는 반도체 제작에 뛰어들 수 없다. 그러기에, 돈 없는 작은 반도체 회사들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이런 식으로는 사업 자체를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큰 회사라고 해서 걱정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초기 투자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덩치를 지녔다 할 지라도, 투자금은 언젠가 회수되어야만 한다. 천문학적인 고정 비용에도 불구하고 이익을 남기려면 폭리를 취하거나 매우 많은 판매량을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 무어의 법칙Moore's law을 따르는 반도체 시장은 사업자가 폭리를 취하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반도체 성능은 점점 향상되는 반면 가격은 계속 떨어졌음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결국, 박리다매薄利多賣 쪽으로 전략을 틀 수 밖에 없었다. 제품 당 이윤으로만 보면 박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설비의 감각상각을 포함한 고정 비용을 판매량으로 나눠서 더해주면 왠만해서는 폭리를 취할 수 없었다. 무조건 많이 팔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오고 있었다.
고정 비용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다면, 상품을 엄청나게 많이 팔아야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등장한 사업 모형이 바로 설계 전문회사와 제작 전문회사의 분리이다. 이들은 팹리스fabless와 파운드리foundry라고 불리는데, 그 어원을 먼저 살펴보자. 반도체 제작을 영어로 fabrication이라고 하며, 줄여서 팹fab이라고도 말한다. 팹은 제작 행위를 말할 수도, 제작 설비나 시설을 지칭할 수도 있다. 반도체 제작 설비 없이 설계만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는 자체 팹이 없기에, "팹이 없다"는 뜻의 팹리스fabless라 불렸다. 반면, 설계 없이 제작만을 전담하는 회사는 주조/주물 공장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파운드리foundry라 불리게 되었다.
반도체 설계만을 전담하는 팹리스는 제작 설비와 관련된 일체의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집중하는 건 설계 자체이기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칩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할 수 있다. 회사에 있는 설비는 고성능 컴퓨터와 반도체 측정 장비일뿐, 제작 시설은 더 이상 없다. 제작은 파운드리에 용역을 맡기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지 않고 용역을 주기에 칩 하나 당 제작 비용,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위 표의 가변 비용variable cost 부분이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막대한 양을 차지하는 고정 비용을 날려버렸기에 총 비용은 감소하게 된다.
제작만을 전담하는 파운드리 입장은 어떨까? 그들이 생산 설비에 엄청난 비용을 선투자해야 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팹리스-파운드리 모형 덕택에 그들은 안정적인 용역 업체(?)가 될 수 있었다. 생산되는 칩이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지, 경쟁 설계회사와의 피튀기는 싸움에서 살아남을 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설계 전문회사와 약속한 대로 잘만 생산해낼 수 있다면 파운드리는 행복하다. 몇몇 파운드리가 다수의 팹리스 회사를 상대하는 구조가 정착되고 나면, 부족한 수요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진다. 굳이 따지자면 팹리스가 갑甲, 파운드리가 을乙이겠으나, 을이 갑보다 더 힘쎈 상황이라고나 할까.
파운드리 시장의 지배자 - TSMC
팹리스-파운드리 사업 모형의 등장은 반도체 시장을 급격하게 성장시켰다. 예를 들어볼까? 컴퓨터의 그래픽 처리 장치(GPU)를 생산하는 엔비디아NVIDIA나 ATI, 유/무선 랜카드 등의 통신관련 칩을 생산하는 마벨Marvell이나 브로드컴Broadcom, 프로그래밍 가능한 하드웨어(FPGA)를 생산하는 자일링스Xilinx나 알테라Altera, 이들은 모두 팹리스 업체들이다. 이들 회사들의 약력을 훑어보면, 대부분 1990년대 이후에 생겨났거나 급성장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파운드리 시장은 어떨까? 이곳에서 우리는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잘(?) 된 건 다 TSMC 때문인가 보다.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 순위: TSMC짱 무시하지 말라능!TSMC의 2010년 매출은 무려 $13.3B인데, 이 액수는 반도체 업계 3위인 도시바보다 살짝 앞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반도체 회사 순위"가 조금은 이상함을 알 수 있다. 1위 인텔부터 8위 마이크론에 까지 회사의 매출액에는 설계/제작 부문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왜 TSMC는 저기에 끼워주지 않는단 말인가. TSMC는 제작만 하는 용역이다보니 반도체 회사에 끼워주기 좀 그런가보다. 어쨌든, 중요한 건 TSMC의 규모가 전체 반도체 시장을 기준으로 봐도 꽤나 크다는 거다. 참고로, 제작전문회사 순위에서 삼성은 2010년 기준으로 10위에 불과하다. 뭐, 올해가 지나면 5위권으로 들어올 꺼라 예상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반도체 회사 순위 1위에 빛나는 인텔의 매출액은 2위 삼성의 1.5배 정도이다. 근데, 제작 전문회사 1위인 TSMC는 2위 UMC보다 3배보다도 더 많은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비단 매출액에서만 차이나는 건 아니다. 1위 TSMC와 2위 UMC 사이의 기술력 격차는 매우 심해서, 팹리스에서 설계한 고성능 반도체의 생산은 TSMC가 사실 상 전담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업계 3위인 글로벌 파운드리Global Foundry가 기술력에 있어서는 UMC보다 낫다. 몇몇 팹리스, 이를테면 GPU나 FPGA 등의 고성능 반도체를 설계하는 업체에게 있어서 TSMC는 유일한 제작 파트너인 셈이다. 그리고 TSMC는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파운드리 시장의 미래
반도체 설비의 초기 투자 비용은 공정이 미세화 됨에 따라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라면, 이런 환경은 팹리스-파운드리 사업 모형을 강화시킬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근데 그 양상이 매우 급진적이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 인텔이 22nm 공정 개발에 처음 착수했을 때, 그 천문학적인 고정 비용을 감당해내려면 인텔의 칩 수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내부 보고가 나왔다고 한다. 업계 1위인 인텔의 자체 수요만으로 팹이 이득을 낼 수 없다면, 결국 외부의 수요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 이 말은 인텔도 이제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싸, 외계인의 기술이 드디어 공개되는 건가.
- 삼성은 현재 파운드리 업계에서 10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급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나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삼성이 주력하는 공정이 32nm 이하 급의 초미세공정이라는 점이다. 45nm, 65nm 같은 중간 과정은 생략한다. 삼성이 파운드리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은 이유는 인텔이 고민하는 점과도 일맥 상통할 것 같다.
- IBM이 반도체 제작 설비에 계속 투자해야 하는지, 가면 갈수록 이윤을 내기 힘들 것임이 뻔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기사가 EE times에 올라 왔었다. 참고로 IBM의 기술력은 인텔이나 삼성에 비해 밀리지 않지만, 그들의 사업 모형이 제품 생산 및 판매에 있지 않기에 다소 생소할 지 모르겠다. 그 기사의 결론 중의 하나는, 미국 내에서는 인텔의 기술 독점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전세계 적으로는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지키는 차원에서라도 IBM의 투자가 이어져야 한다는 거였다.
- 파운드리 업계 3위에 빛나는 글로벌 파운드리는 그 시작점이 AMD의 공정 설비다. 인텔의 라이벌이라 쓰고 호구라 읽는 관계인 AMD는, 자체 수요만으로 팹 시설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수년 전에 공정을 매각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글로벌 파운드리라는 파운드리로의 전환이 시작됐다. 이처럼 반도체 제작 설비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거나 심지어 포기하는 대형 회사들은 의외로 적지 않다.
본 블로거의 생각으로는, 반도체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인텔이나 삼성 같은 초거대 회사만이 자체 제작 설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이는 필연적으로 파운드리 사업의 성장을 가져오겠지만, 그 열매는 현재 업계를 지배 중인 파운드리 회사로 향하지 않을 것 같다. 인텔이나 삼성 등의 초거대 회사가 파운드리 업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날이 조만간 올꺼라 생각한다. 하지만, TSMC만은 그 열매를 함께 나눌 것이라고 본다. TSMC는 이미 나머지 파운드리 들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크며, 삼성의 초미세 공정은 절대로 범용 옵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파운드리 사업의 규모에 있어서 그러하고,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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