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후버: 그는 누구인가 지식 - 이것저것 아는척

버클리에 새더 탑(Sather Tower)이 있다면 스탠포드에는 후버 탑(Hoover Tower)이 있다. 두 학교가 서로 라이벌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두 탑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서 있다. 새더와 후버, 그들은 과연 누구였기에 지금까지 이름을 전해오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피더 새더(Peder Sather)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흥미롭지 않아서 생략하기로 하고, 이번 글에서는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가 도대체 누구인지 살펴볼 것이다. 후버의 정체를 알고 나면 꽤 재밌을텐데, 필자와 함께 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이 바로 후버 탑: 누가 찍었는지 몰라도 잘 찍었네. 잘 찍은 걸 보면 내가 안 찍은 건 다 알테고.

허버트 후버는 1874년 아이오와에서 태어나 1964년 뉴욕에서 죽었던, 기술자/경영자/정치가/박애주의자였다. 기술자로서 능력이 있었을테니 경영으로 방향 전환을 할 수 있었을 꺼라 생각해 보면, 그는 유능한 기술자/경영자이자 성품이 착한 박애주의자였다.스탠포드 대학이 생기자마자 들어가서 공짜로 학교를 다녔던 후버, 그렇지만 남에게는 자애스러웠던 그는 한 때 엄친아였었다.
공짜 좋아해도 대머리 안되는 후버: 나 사실 흑채--백채인가?--뿌렸어

하지만, 후버의 좋았던 날들은 그가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끝나 버렸다. 그가 90년이나 살다간 이유는 어쩌면 54살부터 욕을 바가지로 퍼 먹은게 이유가 아닐까 싶다. 수명 연장의 꿈이라고나 할까.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삼국통일하느라 바쁜 소시민: 욕 먹으면 수명 연장 되는거야? 그럴싸한데?

이쯤에서 후버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보도록 하겠다. 후버는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미국 상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1928년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수행한 정치가였다. 그렇다. 1929년, 역사적인 그 순간에 후버가 미국 대통령직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의 시작을 1929년, 끝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잡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후버는 가장 안 좋은 시기에 대통령직을 시작한 것이다. 반대로 보면 후버가 되자마자 나라를 말아먹은 꼴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후버의 장밋빛 미래

후버는 전임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가 현명하게도(?) 연임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밝히자마자 공화당의 유력 대권 주자가 되었다. 후버는 성공한 기업가이자 경험있는 관료로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있었으며,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 그는 미국의 경제 번영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유권자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고, 심지어 아래와 같은 말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슬로건으로 오고갈 정도로 펌프질을 잘 했더랬다.
모든 냄비에 닭을, 모든 차고에 차를!

a chicken in every pot and a car in every garage!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후버가 저 말을 있는 그대로 슬로건으로 사용했거나 유권자에게 약속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버가 저 정도로 사람들에게 낙관적이고 구체적인 희망을 심어주었고, 결국 저 말을 후버가 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후버는 1928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려 77.2%의 지지를 얻으며 31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자신감 넘치게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만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만연했던 빈곤으로부터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In the large view, we have reached a higher degree of comfort and security than ever existed before in the history of the world. Through liberation from widespread poverty we have reached a higher degree of individual freedom than ever before.

후버 집권의 시작

후버가 집권하면서 취했던 정책의 방향은 대부분 이해가능한 범주 내에 있었다. 당시 공화당 정책 기조를 계승한 그는 규제를 어느정도 강화함과 동시에, 농업 분야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보호무역 정책을 취했다. 언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언론 친화적인 정책을 폈고, 그 결과 후버 집권 초기에는 누구보다도 언론과 사이좋은 대통령이었다. 몇년만 일찍 대통령이 되었으면 이런 정책은 큰 문제없이 돌아갔을 것이고, 우리는 후버의 이름을 기억조차 못했을 것이고, 후버는 욕 안 먹고 잘 살았겠지. 
이쯤되면 적절하게 나타나는 대공황: 1910년-1940년 사이의 경제지표 변화

대공황은 적절하게(?) 나타났을 지 모르겠지만, 후버는 적절하지 못했다. 주식 폭락으로부터 시작해 실물경제로 급속하게 전이되는 대공황을 지켜 보면서도,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의미없는 낙관론을 나열하는 것 뿐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호황/불황이 반복되는 것이 당연하며,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불황이 극복될 것이라는 그의 상황 인식은 대공황의 파도를 더욱 거세지도록 했다.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 당황한 그는 할리-스무트 관세법을 통해 보호주의 무역 정책을 강화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전세계 모든 국가가 보호주의를 채택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국가 간에 자본과 상품이 자유롭게 교류하지 못하는 상황, 그것은 대공황과 겹치서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켰고, 이를 굳이 그럴듯한 용어로 포장하면 신용 경색/유동성 경색/통화속도(money velocity) 감소 등등 오늘날 우리가 빈번하게 듣는 말로 표현된다. 뛰어난 지도자인 줄 알았던 후버는 한낱 평범한 지도자--나는 그가 무능했다고 생각치는 않는다--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공황 시대는 평범함과는 안드로메다 정도의 거리가 있던 격변의 시대였던 것!

후버가 남긴 것들

후버가 일부러 남기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이름이 들어간 건축물이나 단어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글의 서두에서 다뤘던 후버 타워는 개인적인 차원의 기념물이라면, 후버빌(Hooverville)이나 후버 댐은 역사의 기록물이라 할 수 있겠다.

후버빌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판자촌"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대공황 때 직장을 잃고, 재산을 잃고, 집을 잃은 빈민들이 모여들었던 지역이 후버빌인데, 이를 보면 당시에 후버가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국 국민들 입장에서야 수십년간 잘만 살아오다가 순식간에 거지가 되었으니 후버를 싫어했을 법 하다. 노숙자들이 이불 대신 덮었던 신문지를 후버 담요(Hoover Blanket)라고 지칭할 정도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보기만 해도 우울한 후버빌: 대공황 때에는 미국에도 빈민수용소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후버 댐은 애리조나 주와 네바다 주 접경 지대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막아 세운 댐으로, 후버가 집권 중이던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루즈벨트가 집권 중인던 1935년에 완공된 댐이다. 공사를 시작할 때는 볼더(Boulder) 댐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1947년에 후버를 기념하는--척 하면서 사실은 놀려 먹으려는?--뜻에서 후버 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댐은 후버가 들어간것 치고는 굉장히 쓸모가 있어서, 건설 당시에는 세계 최고의 수력 발전 용량을 기록한 댐이었으며 현재에도 세계 35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후버 댐은 콜로라도 강의 범람을 막고, 캘리포니아 및 주변 지역에 물공급을 돕고 있으며, 라스베가스의 탄생에 기여하였고, 그 자체가 관광지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유용한 시설물이라 할 수 있겠다. 댐의 길이가 379m, 높이가 221m라고 하니, 그 크기가 실로 엄청나다고 하겠다.
다재다능한 후버 댐: 삽질도 잘만하면 쓸모가 있다는 교훈을 준다.

후버가 주는 교훈

하지만, 후버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은 경영자로서의 성공, 관료로서의 성공이 꼭 집권자로서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그는 도덕적으로도 깨끗하였고 자애로운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이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물론, 대공황 시의 대처 실패가 후버의 무능력함만을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후버는 시대의 흐름을 잘못 타서, "누구라도"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에 미국 대통령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일 뿐. 우리가 칭송해마지 않은 루즈벨트조차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결국 실패한 정치가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돌이켜 볼 때, 나 개인적으로는 후버에게 돌을 던지고픈 생각이 없다.어찌보면 그도 시대가 낳은 비극의 주인공이었을뿐.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후버가 집권할 때 받았던 "능력 이상의" 기대가 어떻게 그를 망가뜨리고, 미국을 망가뜨리고, 세계 경제를 망가뜨렸는지에 대한 것이다. 당시 미국을 지배하고 있던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맹신, 과도한 자유 및 여러 가지 형태의 정치/경제적 불합리함, 외형적 합법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너무나도 탐욕스러웠던 경제 주체들, 이런 근본적 문제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후버는 "그들만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헤겔이 처음에 말했었나? 후버의 역사만큼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같다.

덧글

  • sunwu 2009/01/13 12:46 # 삭제 답글

    Alea iacta est!
    하지만 후버는 적어도 거대 프로젝트를 하면서 거기에서 떼먹지는 않았습니다.
    대운하나 강정비는 제 2의 평화의 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Steadfast 2009/01/13 16:40 #

    후버댐은 기획부터 완성, 최종 결과에 이르기까지 나름 성공적인 토목 사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후버의 역사는 교만에 가까운 자신감, 생각을 융통성있게 하지 않는 완고함,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무능력함 등입니다.

    저도 대운하 사업은 후버 댐과 비교 조차 할 수 없다고 봅니다.
  • 花郞 2009/01/13 15:06 # 답글

    제 2의 평화의 댐이 아니라 제 1의 대운하가 되겠지요.

    사용예산 규모도 어마어마한데다, 현 대통령이 왜 그렇게까지 그 공사에 집착하는가, 왜 자기 재산 수백억 전부 사회환원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해가면서 대통령이 되려고 했는가 생각하면 답이 명확히 나오잖아요
  • Steadfast 2009/01/13 16:57 #

    어릴 때 "평화의 댐" 짓는다고 코 묻은 돈 150원을 매달 학교에 냈던 생각이 납니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터뜨리면 63빌딩이 물에 잠긴다고 TV에 나온 전문가들이 이야기 했었는데, 그 분들은 다 어떻게 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현재 단계에서, 대운하를 "평화의 댐"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지만--비교할 수 있어도 하면 안되겠죠?--세금을 낭비하는 사업은 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낭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겠죠.
  • 타누키 2009/01/13 15:23 # 답글

    후버댐 사진 액박 신고 드려요~~
  • Steadfast 2009/01/13 16:41 #

    감사합니다. 해당 사진을 수정하였습니다.
  • 행인1 2009/01/13 16:12 # 답글

    후버는 대공황 직전까지는 이미지가 정말 좋았을텐데...(자수성가+의화단 사변시 활약+1차대전때 식량 문제 책임자로 활약)그 이후로는 "이게 다 후버 때문이다!"수준이 되어버렸으니 참 안습이죠. 나중에 트루먼이랑 아이젠하워 시절 정부 위원회에서 일했다는걸 보면 평시에는 괜찮은 인물이었나 봅니다.

    일각에서는 쿨리지 재임시절 방치한 문제가 후버 대에 와서 터진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고 합니다.
  • Steadfast 2009/01/13 16:51 #

    저도 대공황이 후버 때에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라, 쿨리지 재임 시절, 아니 그 이전부터 조금씩 쌓여온 문제들이 모이고 모인 결과라고 봅니다. 문제는 후버가 이미 쿨리지 대통령 시절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고, 시스템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국가의 통치라는 것이 지도자 한 명의 뜻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집권 세력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정책의 큰 방향이 결정된다고 보면, 설령 후버가 초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악했더라도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는 힘들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후버는 대공황 발생 후에도 빠릿빠릿하게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치세의 능신, 난세의 동네북"이 되고 말았죠.
  • -_- 2009/01/13 18:48 # 삭제 답글

    굳이 운율을 맞추자면 동네북 대신에 병x을 쓰는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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